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그레나다 침공 (문단 편집) == 침공의 배경 ==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던 카리브 해의 소국가인 그레나다는 1974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이후 그레나다의 수상이 된 에릭 게리 경(Sir Eric Matthew Gairy, 1922~1997)은 갱과 [[비밀경찰]]을 동원하여 잔혹한 [[독재]] 정치를 펼쳤다. 이 과정에서 외국 자본과의 유착이 있었기에 실업율과 빈곤율이 상승하면서 대중의 불만은 높아져만 갔다. 이런 불만이 가중되던 와중에 1979년 자유와 복지, 교육 등을 외치며 일어난 신보석운동(New Jewel Movement)을 중심으로 한 무력 [[쿠데타]]가 일어나 게리의 독재정권은 비밀경찰과 군, 갱단과 함께 무너졌고 신보석운동을 이끌었던 모리스 비숍이 새 수상으로 취임하여 그레나다 인민 혁명정부를 수립했다. 그레나다 인민 혁명정부는 헌법을 정지시키고 의회를 해산하며 영국식 민주주의를 비난하고 상공회의소 건립과 복지, 교육, 관광산업 등을 추진하면서 대중의 지지를 받으며 근대화 사업에 착수했다. 주변 지역의 서인도 제도 연합주(WIAS)는 혁명을 위법이라고 보고 그레나다 인민 혁명정부를 승인하지 않기로 결의했으나 실질적으로 승인하지 않은 국가들은 독립국이었던 [[도미니카]]와 [[세인트 루시아]] 두 국가뿐이었다. 그러나 1980년 그레나다 인민 혁명정부가 [[가이아나]]의 포버스 번햄 정부를 비난하는 등 가이아나와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자메이카에서도 좌파 정권이 전복되는 등 그레나다는 점점 고립되어 갔다. 이렇게 고립되던 와중에 그레나다는 [[공산권]]에 접근했다. [[소련]]의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한 UN의 비난 결의안에 쿠바와 함께 반대하고 혁명정부 성립 직후부터 쿠바를 비롯한 공산권 국가에게 군사원조도 받는 등 적극적인 [[친소]], 친공산권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는 제2의 쿠바화를 걱정하던 미국과 [[공산주의]]와의 대립 노선을 명확히 하던 [[로널드 레이건]] 정부의 정책과 맞물려 그레나다에 대한 강경책의 원인이 되었고 1980년 11월 미국은 카리브 개발은행에 원조하지만 그레나다에 대해서만은 원조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조치는 그레나다와 카리브 해 각국의 반발을 초래했고 카리브 해 국가들은 그레나다와 공존하겠다는 의지로 결속했다. 1981년 서인도 제도 연합주가 동카리브해 국가기구(OECS)로 발전하면서 그레나다도 그 일원이 되었다. 하지만 그레나다의 인접국들은 그레나다 인민 혁명정부에 대한 불신감을 버리지 못했고 따로 동카리브 안전 보장기구(ECSS)를 만들었다. 이 동카리브 안전 보장기구는 기존의 동카리브 국가기구에서 그레나다, [[세인트 키츠 네비스]], 영국령 [[몬트세랫]]이 빠지고 [[바베이도스]]를 더한 지역 안전 보장 시스템으로 그레나다의 인민 혁명정부를 경계하기 위해 새로이 창립된 기구였다. 그레나다는 이를 의식하여 소련과 쿠바를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과 군사 협정을 체결하고 군사고문을 들여오는 등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그레나다의 행동과 3000여명의 그레나다 인민군은 동카리브에서는 충분한 위협이었다. 1983년 3월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그레나다의 군사기지화를 비난했다. 3월 23일에는 그레나다에 대규모의 공항이 건설되는 것을 파악하고 이를 소련의 군사기지라고 주장하며 비난했다. 또 같은 시기 OECS와 [[미 해군]]의 군함이 바베이도스 군항에서 출항하여 그레나다 해역에서 무력시위를 벌이고 그레나다 침공을 가정한 군사훈련을 [[푸에르토 리코]]에서 진행하는 등 군사적 압박을 강화했다. 1983년 10월 13일 모리스 비숍 그레나다 인민 혁명정부 수상이 급진적 레닌주의자였던 버나드 코드 부수상을 지지하던 허드슨 오스틴 혁명정부 인민군 사령관에 의해 감금당했다. 미국은 10월 15일 비숍 수상의 구출을 바베이도스 정부에 의뢰했지만, 19일 비숍 수상을 지지하는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면서 내전이 발생하여 그 와중에 도주하던 비숍 수상과 각료들이 군에 의해 총살당했다. 버나드 코드 부수상과 허드슨 오스틴 사령관은 혁명군사 평의회 정부를 수립하고 폴 스쿤 그레나다 총독을 투옥하며 계엄령을 선포했다. 20일에는 미국 정부의 [[조지 H. W. 부시]] 부통령을 필두로 한 특별상황팀이 편성되어 그레나다 침공계획을 수립해 레이건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레이건 대통령도 이를 승인하면서 미군은 그레나다에 대한 본격적인 침공 준비에 돌입했다. 10월 21일, 바베이도스에서 그레나다를 제외한 OECS 회원국과 바베이도스 정부간의 긴급 회동이 이루어져 [[자메이카]]와 미국을 초청해 그레나다를 침공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회의에서 를 이유로 폴 스쿤 그레나다 총독의 석방과 총독의 지휘, 감독 아래 민주적인 선거 개최를 그레나다 군사정부에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는 거의 '우리 말 안들으면 침공할 거니까 알아서 잘 기어라.' 수준의 협박이었고 국제사회에서 많은 비난을 받았다. 이날 그레나다에서는 계엄령이 해제되었고 24일에는 대다수의 상점과 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다. 한편 22일부터 23일에 걸쳐 열린 카리브 공동체의 긴급회의도 폴 스쿤 그레나다 총독의 감독과 지회 하에서 민주적인 총선거와 그레나다 군사정부를 비난하는 것에 대한 건에는 의견들이 일치했지만 각국의 평화유지군 파견에는 의견이 분분했다. 평화유지군의 파견을 주장한 OECS 국가들에 대하여 [[트리니다드 토바고]], 가이아나, [[벨리즈]], [[바하마]]는 강하게 반대했고, 결국 회의는 결렬됐다. 결국 10월 25일 오전 5시 미국은 사전 선전포고 없이 쿠바와 소련이 그레나다에 직접적인 개입을 하는 상황에서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그레나다를 침공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